겨울의 문턱, 바람이 서늘해지고 어둠이 깊어지는 저녁이면 작은 찻잔 하나가 전부인 듯한 순간이 찾아온다. 차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부엌 한구석에 놓여 있던 찻잎을 주전자에 넣고 물을 부어 잠시 기다리는 일상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런데 그 기다림 속에는 어떤 알 수 없는 고요함이 깃들어 있다.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손에 쥐면, 세상은 조금 느리게 흘러간다.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드러난다. 가스레인지의 은은한 불빛, 유리잔에 맺힌 수증기의 흔적, 창문 너머로 들리는 잔잔한 바람 소리. 모든 것이 차의 향기에 스며들어 함께 흘러가는 것 같다.
가끔은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마신다. 오롯이 나만의 시간, 내 안에 남겨진 조용한 울림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이다. 찻잎이 풀어지는 모습은 마치 내 마음이 천천히 풀어지는 것과 같다.어떤 일로 인해 마음이 조급했다면, 그 불안함이 어느새 따뜻한 온기로 변한다.
차 한 잔에는 계절이 담겨 있다. 봄의 녹차는 싱그러운 새싹의 향기를, 여름의 아이스티는 맑은 하늘의 기운을, 그리고 지금 내 앞에 놓인 겨울 차는 깊고 묵직한 나무 향기를 품고 있다. 차를 마시는 시간은 마치 계절을 찬찬히 곱씹으며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는 일과 같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선택과 갈림길 앞에 선다. 그러나 이런 작은 차 한 잔의 시간은 선택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마주하고, 받아들이고, 온기를 느끼는 것뿐이다. 이 순간만큼은 삶이 복잡하지 않다. 단순하고 고요하다.
혹시 당신도 차 한 잔을 마시며 그 온기를 느껴보지 않겠는가? 차가 당신에게 무엇을 속삭이는지 귀 기울여보라. 그것은 바람처럼 가볍고, 나뭇잎처럼 부드러울 것이다. 그리고 당신도 모르는 사이, 당신의 마음에 잔잔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찻잔을 내려놓고 문득 창밖을 본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달빛이 스며든 어둠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오늘, 차 한 잔이 내게 준 것은 그저 따뜻함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시 다가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