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작소/단편 이야기

바람이 닿는 곳에, 할머니가 있었다

들마루 2025. 5. 26. 00:42

바람이 닿는 곳에, 할머니가 있었다

신안 섬마을에서 만난 한 사람, 한 계절의 이야기


기억은 바람을 타고 돌아온다

신안, 전남의 서쪽. 천 개가 넘는 섬이 흩어진 바다의 지도 위에서, 그중 하나가 나를 부른다. 비금도와 도초도 사이, 이름보다 감각으로 각인된 섬. 나는 다시 그 길을 따라 걷는다.

기억은 늘 선명하지 않다. 하지만 바람과 함께 묻어온 풍경들은, 마치 오래된 노래처럼 낯익고 기묘하다. 여름방학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멜로디, 햇살 아래 흔들리는 손짓, 뺨을 스치는 바람의 결. 그 모든 조각들이, 눈 안 깊숙한 곳에서 천천히 겹쳐진다.

그날도 그랬다. 다음 순간을 예측할 수 없던 마을 모퉁이에서,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마치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낯설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고요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글 쓰는 사람이랬지? 글에는 바람이 있어야 해.”

짧은 말 한마디가 바람처럼 스며들었다. 그 후로, 내 문장들은 바람의 결을 닮기 시작했다. 평범한 말을 건넨 손끝의 온기, 그 조용한 진심이 오래도록 내 가슴에 머물렀다.


오래 남는 것들은 마을의 지도를 기억한다

하루는 천천히 흐른다. 계절과 계절 사이의 여백처럼. 길을 걷다 문득 떠오른다. “당신은 어떻게 이 섬을 건너오셨나요?” 묻지 않아도 남는 질문, 묻지 않아야 알 수 있는 감정.

할머니는 내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이름보다 정확했다. 이름 대신 기억을 건네는 사람. 그 눈빛 하나로, 나는 말없이 마음을 건넬 수 있었다.

기억은 의도 없이 되살아났다. 오래전 지나친 장면처럼 조용히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잠겨 있던 감정이 풀리고, 잊었다고 생각했던 풍경들이 되살아났다.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은 충동, 침묵으로 남겨둔 문장들이 가슴속에서 다시 피어올랐다.


글을 모르는 손이 써낸 시

그녀는 여든을 넘겼다고 했다. 걸음은 느려졌고 허리는 굽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투명하고 단단했다. 오래 바다를 마주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시선. 조용하지만 멀리 보는 눈.

그녀의 하루는 손으로 쓰였다. 이른 새벽엔 마당의 이슬을 닦고, 점심 무렵엔 된장의 숨을 돌보고, 오후에는 수선화 구근을 손질했다. 말 대신 손끝으로 하루를 짓는 사람.

“나는 글은 몰라. 대신 손으로 말해.”

그녀는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햇볕에 그을린 결, 깊고 얇은 주름 사이에 남은 기억들. 그 손은 소금물을 길었고, 아이를 업었고, 바람을 견뎠다.

나는 그 손의 온기를 기억했다. 언젠가 받았던 엿 한 조각보다, 오래 남는 감촉이었다. 책 속 문장이 아닌, 삶의 문장이었다.


바다는 같고, 사람은 달라진다

마루 끝에 나란히 앉아 있을 때, 해는 기울고 있었다. 햇빛이 지붕을 타고 흘러내리고, 바다는 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도시의 이야기를 꺼냈다. 마감에 쫓기던 날들, 말보다 빠르게 닳아가는 감정들, 누군가의 시선을 두려워하던 순간들. 말은 가벼웠지만, 그 안엔 무거운 하루들이 녹아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들었다. 그러고는 짧게 말했다.

“바다는 늘 같지. 근데 사람은 달라져.”

그 말을 따라온 침묵이 더 깊었다. 그리고 나직이 이어진 한 문장.

“그게 좋은 거여. 달라졌다는 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거니까.”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그 사이에 서 있는 내가, 그제야 조금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시가 되는 하루

그녀의 하루는 일정했고, 그 일정 속엔 계절이 녹아 있었다. 새벽엔 달빛에 눈뜨고, 해가 들면 마당을 쓸고, 저녁이면 나무를 다듬었다. 이름 없는 행위들이 모여 하루가 되고, 삶이 되었다.

그녀는 시를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하루가 시라고 믿는다. 말없이도 전해지는 마음, 손짓 하나에 담긴 문장, 멈춰 선 눈빛 속의 리듬.

나는 도시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을 그녀에게 배웠다. 기다리는 법, 비우는 법, 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법. 시는 문장에 있지 않았다. 시는 살아낸 하루에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바람이랑 살면, 외롭지 않아. 말은 없어도, 다 알아주거든.”

그 말은 내 안에 오래 머물렀다. 바람처럼 조용하고, 깊은 위로였다. 그날 이후, 나는 문장 대신 바람을 먼저 들여다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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